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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집 안의 검은 신발런던, 집 2025. 5. 15. 00:17
어느 날, 아래층에서 울려오는 공사 소음을 견디고 있던 나는 위층,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 발소리는 이미 계단을 반쯤 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허락도 없이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아래층 공사를 맡았던 카우보이 빌더였다. 예고 없는 침입자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지금도 그 남자의 컨스트럭션 부츠가 계단을 올라오는 장면을 똑똑히 기억한다.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검은 공사 현장 부츠가 막 새로 칠한 우리 집 계단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그 모습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참을 수 없이 화나게 했던 것은, 그가 그 부츠를 신은 채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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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지-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가는 날.런던, 집 2025. 5. 15. 00:15
동지는 일년 중 밤이 제일 긴 날이다. 내가 온 곳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가는 날이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은 그 틈을 통해 저 쪽 세계에 있던 귀신이 나와 사람들의 집 곳곳을 돌아다닌다고도 하고, 다른 세계의 기운이 이쪽으로 스며든다고도 한다. 평범한 증축으로 시작되었던 이 사건은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경계 자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경계를 지키려는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고, 동시에 영국 건축법과 관리 주체들의 어두운 단면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지난했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경험이었다. 어떤 일들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는 자리에서 벌어진다. 모든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감각이 어긋나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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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Oroborous: 꼬리를 잡아먹는 머리런던, 집 2025. 5. 15. 00:12
아랫집과의 많은 갈등을 겪으며, 나는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는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였던 집이 둘로 나뉘는지, 나뉜 후에는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 경계는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는지—이런 질문들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한 번은 데미 무어가 주연한 Substanc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젊어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자신을 둘로 나누는 약물을 투여받는다. 분리의 과정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쪼개진 두 인격은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채 함께 파멸한다. 나뉘었지만 분리되지 못한 존재들. 그 이야기가 내 안에 오래 남았다. 이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무렵, 이곳은 겉보기에는—혹은 법적으로는—두 채로 분리된 집이었다. 하지만 건축적인 관점으로 보면, 거의 하나의 집이었다. 런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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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런던 클레이런던, 집 2025. 5. 15. 00:10
클레이 벽돌은 아마도 런던에서 가장 흔한 건축 자재일 것이다. 그것은 이 도시의 토질, 유명한 런던 클레이 덕분이다. 이 진흙은 마르면 수축하고, 젖으면 팽창하는 특성이 있어 계절에 따라 지반이 움직이며 구조물에 손상을 줄 수 있다. 그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런던 대부분은 이 진흙질의 땅 위에 세워져 있다. 제일 구하기 쉬운 재료였던 이 진흙을 압축하고 가마에 구워 만든 노르스름한 갈색 벽돌은 런던 건축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다. 작고 가벼우며 부드러운 이 벽돌은 쌓기도 쉬운 만큼, 허물기도 쉽다. 나는 이 점토 벽돌로 지어진 빅토리아 시대의 주택에 살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아랫집 이웃이 증축 공사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이 집의 외벽을 허무는 모습을 지켜봤다. 완고했던 벽이 벽돌 조각들로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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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우: YELLOW카테고리 없음 2025. 2. 26. 05:00
옐로우의 이야기 – 사라진 사람들옐로우는 오래 전 내 직장 건물 앞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미국 여성이다.건물의 서쪽 통창 바로 바깥에는 계단처럼 약간 올라가는 삼각형 모양의 평평한 공간이 있었는데, yellow의 집, 텐트는 이 삼각형 공간 위, 건물의 안과 밖을 가르는 투명한 유리통창 바로 바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기묘한 동거는 내가 입사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녀를 그 곳에서 내보내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녀가 점유한 곳은 '건물의 '바깥'이었기에 결국엔 회사도 간섭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건물의 일부처럼 그곳에 자리잡았고, 나는 그저 무심히 매일 그녀의 텐트를 지나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인사를 하고, 가끔 지나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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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럼에도 불구하고.런던, 집 2024. 10. 29. 21:50
이 사건은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데 일조했고 이 곳 저 곳으로 떠돌아다니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큰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내가 겪은 이 일이 인류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이웃들과 이야기 했을 때, 상당 수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경계분쟁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에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앞으로 내가 이런 분쟁을 겪은 마지막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경계 분쟁을 주제로 한 옛날 회화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징기즈칸이 유럽을 휩쓸기 전, 그는 이미 아시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한국을 정복한 후 바다 건너 위치한 일본까지 배를 타고 넘어가 정벌하려 했다. 비록 태풍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당시까지 인류 최대의 해양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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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균열런던, 집 2024. 10. 29. 21:46
슈퍼마켓 하나도 없는 단촐한 섬이라 멍하게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멀리 도망쳐왔어도 엉망이 된 집이 계속 생각났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돌아가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와 같은 현실적인 생각도 있었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 중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동지에 얽힌 이야기이다. 전해져오는 이야기로 땅과 하늘에는 엄격한 경계가 있는데, 밤이 제일 길어지는 그 날, 동지에는 그 경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귀신들이 나와 사람들 사는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뜨면 다시 틈 사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균열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7년, 도리스 살세도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바닥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지금도 테이트에 가면 콘크리트로 그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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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피: 바다를 건너다런던, 집 2024. 10. 29. 21:39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나는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런던 근교의 수많은 장소들을 거쳐, 프랑스, 이탈리아, 모로코, 미국, 그리고 결국 한국까지 도망쳐 통영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두 시간, 바다를 건너 총 인구 27명의 작은 섬까지 흘러들어갔다. 도망자에게도 스타일은 있었다. 뻥 뚫린 하늘길보다는 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싶었다. 나는 유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고, 우리 친가는 한국 남단에 있는 섬 거제도 출신이다. 이런 나의 뿌리와 더불어 지금은 섬나라에서 살고 있어서일까, 바다를 건너 숨고 싶었다. 하늘처럼 뻥 뚫려있지 않기에 바다는 섬과 대륙을 분리시키고 경계를 설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대륙과 대륙 사이의 연결 통로로 작용한다.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