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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계 분쟁: 영국판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런던, 집 2024. 10. 29. 21:37
아랫집은 건축에 문외한이었고, 찾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업체를 찾아 일을 맡겼다. 그리고 공사 기간 중 인부들을 감독하는 대신 집을 떠나 있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아랫집이 선정한 업체는 심각한 수준 미달이었고, 공사가 잘 못 되면서 이 상황을 관리해야 할 구청의 관할 부서나 감리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아랫집이 집 뒷면을 박살낸 후, 나는 구청에 수십 통의 전화를 걸고 수없이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의 관리 주체들은 매우 느렸고, 이 사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1970년대, 당시 수상 마거릿 대처가 영국 경제구조에 칼을 빼들면서 건물 감리 시스템(을 비롯한 많은 분야)을 민영화한 이후, 돈을 주고 민간 감리 업체를 고용하는 것은 영국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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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지와 붕괴 사이런던, 집 2024. 10. 6. 20:49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주택들로 가득 찬 주거지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증축을 하거나 리모델링을 했다. 나는 빅토리안 하우스의 2층을 가지고 있었고, 코로나 이후에 이사 온 1층의 소유주는 자신의 뒷 마당 쪽으로 증축 공사를 하려 했다. 도면만 봤을 때는 특별할 것 없는 증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증축 공사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어 잘못되기 시작했다. 미국 현대미술 작가 고든 마타클락은 ‘지지와 붕괴 사이의 적당한 절단’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아랫집의 공사에 ‘적당한’ 절단은 없었다. 공사를 위해 두 개의 외벽을 무너뜨린 아랫집은 지지와 붕괴 사이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경고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구조물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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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자나무와 젠트리피케이션런던, 집 2024. 10. 6. 03:38
토트넘(Tottenham)은 일찍이 런던의 아프리카, 남미계 이민자들이 자리 잡고 살던 곳이다. 런던의 32개 구 중 가장 인종적 다양성이 높은 곳이기도 하며, 런던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로 알려졌고, 1985년과 2011년에 두 번의 유명한 폭동이 이곳 토트넘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던 2019년 전후로, 토트넘은 변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 중, 도시에 머물고 싶지만 치솟는 런던의 월세와 집값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토트넘으로 이사 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제드 넬슨(Zed Nelson)의 2019년 다큐멘터리 ‘더 스트릿(The Street)’은 런던 동부 2존에 위치한 혹스턴(Hoxton)의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젊은 이주민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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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밖으로, 밖으로내가 본 것들 2024. 6. 29. 08:00
아트엔젤(Artangel)은 '뛰어난 예술, 예상하지 못한 장소 (Extraordinary Art, Unexpected Places)' 라는 모토 아래 현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영국의 선구적인 미술 기관으로, 전통적인 갤러리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해 공공장소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술 작품을 선보인다. 영국 및 해외 도시의 다양한 공공 공간을 예술 작품의 무대로 활용하여 공원, 거리, 버려진 건물, 지하철역, 역사적인 건축물 등으로, 각각의 공간이 작품에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일상과 분리된 고급 문화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으로의 예술을 강조하는 아트엔젤은, 1985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장장 40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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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는 건물내가 본 것들 2024. 6. 1. 01:29
여기 일본의 오사카에 유명한 신사 '이세신궁'이 있다. 이 신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신사의 특별한 건축방법 때문인데, 이세신궁은 특이하게도 '식년천궁'이라고 하여 20년마다 한 번씩 125개의 건물을 모두 새로 짓고 신을 새 건물로 옮기는 행사를 한다. 때문에 20년 후 새로 건물을 지을 곳을 신사 바로 옆에 두고 있다. 멀쩡한 건물을 때려부수고 똑같은 새 건물을 바로 옆에 짓는다니, 이 관습에 얽힌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식년천궁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신이 거주하는 건물이 노후되지 않도록 하면서 신에게 활기를 불어넣기 위함이라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20년마다 건물을 새로 지을때는 정확히 이세신궁이 처음 건설되었을 때의 고대 건물 양식과 건축 공법을 그대로 따르며, 해체된 목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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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은 예술 세계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내가 본 것들 2024. 4. 30. 15:02
얼마 전, 한 미술 웹진의 편집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대화 중 단연 자주 등장한 키워드는 '지방의 (혹은 시골의) 예술신' 이었다. 내 주위의 많은 동료 예술가들과 문화계 종사자 지인들 중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런던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는 좀 더 싼 대도시, 예를 들어 베를린, 암스테르담 등으로 이주해 간 친구들도 있으나,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가거나 런던 교외로 이주해 간 사람도 있다. 시골로 이주한 나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지역 동료들은 어떤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과 더불어 대도시에 집중하는 문화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 지역사회의 예술활동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역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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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과 공공미술: 세인트 펜크라스 역, '와이어'내가 본 것들 2024. 3. 29. 15:30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런던의 세인트 팬크라스 역은 카메라 렌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규모이며 우아한 고딕 양식에 다양한 석재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며진 역이다. 런던에 수 많은 기차역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세인트 펜크라스는 상징적이다. 매 주, 이 역에서 유로스타를 이용하는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해저터널을 통과해 유럽 대륙과 영국을 드나든다. 이 역을 가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아마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에 대한 감상적인 기대 때문일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인지, 이 역에는 영국에서 가장 야심찬 공공미술 프로그램 중 하나가 운영중이다. 여행에 로맨스를 불어넣고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마법같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속철도회사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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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크로스: 도시와 백년지대계내가 본 것들 2024. 3. 4. 00:06
어린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에 가기위해 9와 3/4 승강장에서 기차를 타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법사들만 이용할 수 있는 이 승강장은 어린 해리가 마법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관문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곳이지만, 우리같은 머글들에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다. 킹스크로스 기차역(King’s Cross Station)은 유로스타의 출발지이자 종착역으로, 영국 북부 지역의 대표 산업 도시와 통하는 연결로이자 1800년대 중반 산업혁명의 상징인 증기기관차의 발착지이기도 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 당시 기차 운송의 폭팔적 성장에 힘입어 킹스크로스는 급속하게 팽창했으나, 산업혁명의 시대가 저물며 주변 상하차 부지(약 25만㎡)과 각종 공장, 창고들은 점차 버려진 땅이 됐다. 당연하게도 지역은 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