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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바비칸 : 야만적인 콘크리트 정글
    내가 본 것들 2023. 3. 11. 14:22

    런던 1존 한 가운데, 빌딩으로 가득찬 곳에 숨겨진 정글이 있다. 유리와 철골 지붕, 콘크리트 건물과 방대한 양의 식물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바비칸 식물원이다.   

     

     

    바비칸 식물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더 바비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야 하겠다. '더 바비칸'은 런던 1존에 위치한 멀티플렉스로, 1965년에서 1976년에 걸쳐 2차대전 피폭으로 황폐화된 런던 크리플게이트(Cripplegate) 지역에 조성되었다. 2차대전 종전 후, 주거 공간에 대한 수요가 폭팔적으로 증가하여, 세인트 폴 성당, 뱅크 오브 잉글랜드 등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던 이 지역을 부지로 낙점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위한 주거공간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아파트 주변에 바비칸 센터, 식물원, 도서관, 카페 등 다양한 성격의 공간들을 배치하며 외부인 (혹은 잠재적 범죄자)의 접근을 통제하려 했다*. 런던의 대표적인 브루탈리즘 (Brutalism) 건축물로 유명하다 (브루탈리즘 건축은  20세기, 좀 더 정확하게는 50-60년대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미국, 브라질 등을 휩쓸었던 건축 스타일인데, 육중한 노출 콘크리트, 벽돌 등 재료를 전면으로 드러내어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근처 뱅크 지역의 고급스러운 역사적 건물들 사이에서 일견 노후해보이기도 하지만, 더 바비칸 안쪽으로 들어서면 탁 트인 중정을 시작으로 마법같은 공간들이 펼쳐진다.

     

    The Barbican map, Copyright: Barbican Art Centre

    바비칸 식물원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5년 겨울, 모 가방브랜드의 화보 촬영에서 잠깐 통역을 맡았을 때였다. 추웠던 1월, 봄 상품 촬영을 위해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모델들과 식물원 안으로 들어갔을 때, 특유의 습하고 더운 기운이 온 몸을 덮던 느낌이 기억난다. 1884년에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유리지붕으로 덮인 복층 구조의 콘크리트 정글에는 고사리, 야자, 몬스테라, 커피나무, 선인장과 다육, 난 등 총 1500여종의 식물이 살고있다. 수직, 수평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초록색 식물과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의 시각적 대비감이 마치 공상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준다.

     

    The Barbican Conservatory, Copyright: Rumman Amin / Unsplash

    환경과학 저서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 에서 작가 엘런 와이즈만은 "자연은 결국 이긴다" 고 말했다. 먼 훗날,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 인간들이 지구에서 한꺼번에 사라지게 된다면 돌보는 인간들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식물에게 집어삼켜질 것이라고도 말한다. 바비칸 식물원에서 콘크리트 난간 사이를 뒤덮은 식물들을 보면서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시작은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하게된다. 

     

    본디 식물원은 약용 식물 연구 목적으로 고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럽 식물원인 이태리 파도바 식물원은 의과대학 부설 식물원이었으며, 약재가 될만한 식물을 수집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과 실습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전쟁에 나서면서, 식민지에서 가져온 수 많은 식물들을 전시하고 식민지 개척의 성과를 선전하는 새로운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식물들이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뽑혀져서 영국으로 옮겨져왔고, 자생지와는 다른 기후를 보완하기 위해 채광과 온도조절을 위한 유리 온실 식물원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듯, 근대의 식물원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산물이라는 어두운 과거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Map of the New Kingdom of New Granada, 1630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바비칸 식물원은 나같은 식덕 도시 거주자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런던 1존 중심가 한 가운데, 사방이 식물로 둘러쌓인 오아시스같은 공간의 희소성 때문이기도 하고, 좁은 공간을 최대로 활용한 디자인이 주는 독특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복층 구조로 된 식물원의 특성상 1층에서 2층을 올려다 볼 때, 2층에서 1층을 내려다 볼 때, 2층 여러 곳을 연결하는 다리를 지날 때, 계단을 올라갈 때, 내려갈 때 다양한 각도가 제공되어 식물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 (면적의 문제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좁게 디자인한 통로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 곳에 멈춰있기 보다는 계속 걸어다녀야 하는 점 또한 식물원 내부에서 활동성을 높이고,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식물 자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식물, 구조물 등과의 관계를 같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이다. 식물원 안에 놓인 식물의 크기, 배치 높이, 그에 따른 균형과 형태, 식물의 선과 매스의 관계를 따라가는 것이다. 얽혀있는 자유로운 선의 열대식물들 사이로 직선의 콘크리트와 흰색 철골 지붕이 보이고, 그 옆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관엽나무로 시선을 옮긴다. 유리지붕 사이로 쏟아져들어오는 빛과 콘크리트 건물 밑으로 생기는 그림자의 절묘한 조화가 눈을 사로잡을 때 즈음 그 밑에 자리잡은 작은 연못과 그 위에 어른거리는 반사상이 보인다. 이렇게 빛과 그림자, 주변 환경과 구조물의 배치를 를 보는 것은 사실 전통적 동양 정원의 감상법이다. 정원에 빛과 그림자를 염두에 두어 나무와 석재, 연못 등을 배치하고, 그 곳에서 나오는  균형과 조화를 감상하는 전통은 동아시아 정원을 아우르는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다만 기묘한 모양의 바위 대신에 회색 콘크리트 난간이 들어가고, 비단 잉어가 살고있는 연못 위에는 매화나무 대신 울창한 열대나무가 가지를 드리울 뿐, 바비칸 식물원에서도 이 감상법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유럽의 역사를 한 데 섞은듯한 이 혼종의 식물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The Barbican Conservatory, Copyright: Taylor Xu / Unsplash

    현재 바비칸 식물원은 지정일에 무료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자주 바뀌니 바비칸 웹사이트에서 필히 사전예약) 마침 작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식물원 투어가 진행중이고, 식물원 요가, 건축 투어등 바비칸에서 다양한 퍼블릭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니 런던 뱅크 지역의 복잡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현기증이 난다면 잠깐 식물원에 들러 도심속의 정글을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각주

    *방어공간이론 (뉴욕대 건축과 교수였던 오스카 뉴먼이 1970년대에 제안한 범죄 예방을 위한 도시 디자인 이론)

     

    참고 사이트

    바비칸 식물원 예약 페이지

    https://www.barbican.org.uk/whats-on/2023/event/visit-the-conservatory

    그 외 바비칸 식물관 투어, 건축 투어, 식물원 요가 등 바비칸에서 제공하는 퍼블릭 프로그램 예약 

    What's on – Tours & public spaces | Barbican

     

    파도바 식물원

    Botanical Garden | OrtoBotanico di Padova (ortobotanicopd.it)

    파도바 식물원 – 유네스코와 유산 (unesco.or.kr)

     

    근대 식물원 발전사  

    Botanical gardens in colonial empires | EH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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