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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the Gap! 런던 지하철의 예술 프로그램내가 본 것들 2023. 10. 1. 05:16
서울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스크린 도어에 하얀 글자로 적힌 시를 읽어보곤 했다. 그 때 눈에 들어왔던 몇몇 글귀는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남아있으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찰나의 예술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던 프로젝트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영국에도 소개할만한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하철을 처음 발명한 국가는 영국이기에 훨씬 더 역사가 깊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 (Art on the Underground)’는 런던교통공사(Transport for London)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공공예술 프로그램이다. TFL은 런던 시민의 발 같은 존재인데, 런던 지하철의 운영회사이자, 거미줄 같은 지하 철로와 도로망의 건설, 보수, 관리자이며 영국 내 가장 오래된 공공예술 부문 후원자 중 하나이다. 회화, 설치, 조각, 공예, 디지털 아트, 퍼포먼스, 판화, 건축, 지하철 지도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매체를 통합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을 쉽게 하고,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예술이 어떻게 공공 공간을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단체가 바로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이다.

Image capture from Art on the Underground website, 2023 이 전통은 20세기 초 런던 지하철의 수장이었던 프랭크 픽(Frank Pick)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통수단회사가 판매하는 것은 ‘이동’이라는 서비스인데, 그는 교통수단을 타는 과정에서 역에 진입하고, 티켓을 사고, 역무원을 만나고, 역 내부공간을 경험하고, 지하철을 타는 이 모든 것이 서비스의 일부임을 인지하여, ‘토탈 디자인(Total Design)’ 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사람이다. 독특한 원형 로고, 서체, 상징적인 지하철 역 디자인과 포스터 디자인 등,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 철도 시스템이 모방했던 런던 지하철의 정체성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헨리 무어(Henry Moore), 에두아르도 파올로지(Eduardo Paolozzi) 같은 당대 유명 예술가, 혹은 찰스 클락(Charles Clark) 같은 건축사들과 협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 현재에 이르렀다. 프랭크 픽 이후 1980년대부터 정기적으로 예술 커미셔닝이 이루어졌으며, 2000년에 TFL의 공공예술부분을 담당하는 플랫폼 포 아트(Platform for Art)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2007년에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 (Art on the Underground)로 명칭을 바꿨으며 국제공공교통연합(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ublic Transportation)에서 문화 부분 수상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Beauty, Langlands & Bell, Piccadilly Circus station, 2016, Photo: Thierry Bal, Copyright: TFL 저번 기고에서 언급했던 공공예술 프로젝트 단체인 어셈블(ASSEMBLE)은 예술가 매튜 로우(Matthew Row)와 함께 2017년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의 의뢰를 받아, 한국에서는 축구선수 손흥민의 홈 구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토트넘의 세븐시스터즈 역 앞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공간을 변신시켰다. 공간의 외관을 장식할 색색의 타일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직접 구워내는 타일 만들기 워크샵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주민의 참여도가 높았던 프로젝트였기에 지역 내에서의 반응도 좋았고, 지금은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아침에 출근하는 토트넘 주민들을 위해 커피와 차를 파는 지하철 커피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Seven Sisters Station Forecourt, Photo copyright: ASSEMBLE 비교적 최근의 프로젝트 중 눈에 띄는 것은 올해 셰니즈 오레타(Shenece Oretha)가 작업한 Route Words라는 사운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북런던 핀즈버리 파크에 위치한 영국에서 제일 오래된 캐리비안계 흑인 서점 및 출판사인 뉴 비컨 북스 (New Beacon Books)의 출판물 카탈로그에서 영감을 받았고, 말과 목소리의 집단적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흑인 커뮤니티의 문화적 역사에 대한 셰니즈의 작업은 올해 8월에 라이브로 핀즈버리파크역에 송출되었으며, 여기에서 들어볼 수 있다.

Shenece Oretha, Route Words: Where are our voices aloud?, 2023 현 수장인 엘레노어 핀필드(Elenor Pinfield)를 필두로 프로듀서, 큐레이터 등 약 7-10명이 함께 일하며, 디자인 뮤지엄 (The Design Museum), 캠든 아트센터 (Camden Art Centre), 레이븐 로우 (Raven Row) 등 런던 탑급 미술 기관의 디렉터들과 예술가, 런던교통공사(TFL), 런던정책공사(The Greater London Authority)의 고위급 교통 전문가, 정책 전문가들까지 아우르는 자문위원단이 있다. 런던교통공사가 자금을 대며, 아트 카운슬 잉글랜드(Art Council England)에서도 기금을 받고, 프로젝트에 따라서 기업 스폰서도 활발히 받는다.*
언젠가 런던에 올 기회가 있다면, 굳이 미술관에 가는 것은 취향이 아니지만 런던까지 와서 아무런 문화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망설여진다면, Art on the Underground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이용할 지하철역에 어떤 예술 프로젝트가 있는지 체크해 보자. 예술 작품들이 런던 내 지하철 역, 혹은 그 주변 곳곳에 숨어서 행인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런던 지하철과 예술가들이 심사숙고하여 만든 수준 높은 작업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마음에 드는프로젝트가 있다면 지하철을 이용할 때 한번 가 보길 권한다.
참고 사이트
Art on the Underground의 역사
London Transport Museum (ltmuseum.co.uk)*
Art on the Underground
Projects Archive - Art on the Underground (tfl.gov.uk)
셰니즈 오레타 (Shenece Oretha)
어셈블 (ASSEMBLE)
Assemble (assemblestudio.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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